이번 글은 예전에 운영했던 Pulse-Beat's Bits-Box 블로그의 글을 옮겨 왔다.
하버드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구입한 도서 1위인 『 1984 』라는 책을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덕분에 예전에 써놨던 감상문을 꺼내어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지요. 교수님의 추천으로, 그리고 과제로 나왔었기에 재밌고,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들 조지오웰의 『 동물농장 』이라는 책은 흔히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같은 작가가 쓴 『1984 』또한 그 이름 못지 않게 유명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는 고전으로 자리를 잡았지요. 현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세계를 그리지만, 그 세계와 현 세계과 닮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 번 기회에 읽어보시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래의 감상문에는 줄거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식의 지배를 넘어, 1984 - 조지 오웰
『1984』라는 책은 『동물농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조지 오웰의 작품이다. 제목에서처럼 누구나가 알 수 있듯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84』년이다. 즉, 이 작품이 만들어진 1948년에서 예상해본 『1984』년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려낸 미래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미래를 상상해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거움과 쾌감을 느낀다. 밝은 미래의 멋진 모습과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앞날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띄게 마련이다.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거에 사람들이 상상해온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멋지고 밝은 미래를 상상하듯, 현 시대 이전 사람들도 오늘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교하여, 작가가 어떠한 미래를 그려내고 있었을 지에 대해 궁금해진다. 과거에 비해 편리해지고 안전해지고 화려해진 모습들을 느끼면 불현 듯 우리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 시대의 일상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현 시대의 사람들은 더 나아진 오늘을 체감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불행하고 암울한 미래의 모습보다는 행복하고 밝은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를 궁금해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하고 멋진 모습의 미래의 모습만을 상상하기에는 『1984』라는 책은 나의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낙관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1984』년은 1940년대에 바라본 『1984』년의 모습이다. 화려하고 멋지게 변한 환경과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미래 모습들에 대해서 그려냈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암울하고, 참담한 미래를 그려내었다. 현재의 우리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다소 사회주의 성격이 바탕이 된 이 소설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감이 없지 않지만, 현재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을 듯한 모습을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1984』 속의 현재는, 사회주의 체제가 기반인, 권력의 세계로써 자유로우며 기본권이 지켜지고 평등이 존중되는 현 사회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1984』의 배경은 철저하게 인식을 통재당하고 있는 계급사회이며 사회 깊숙이 '정치'가 행해지는 권력사회이다. 한 개인이 끊임없이 저항을 통해서 그 권력에 맞서 획일화된 이념적 사상을 벗어나보려고 하지만 굳건하고 거대한 지배 체계 앞에서는 무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의 현 세계와는 너무나도 다른 세계이지만 분명히 현재에서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는 소설이다.
『1984』년의 원스턴 스미스는 철저한 지배를 당하고 있다. 그는 '텔레스크린' 이라는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기계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처럼 우수한 기능의 인터넷, 텔레비전, 전화의 기능을 모두 가진 뛰어난 발명품인데 비해서, 철저히 권력자의 피지배자 입장에 서서 그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경직된 사회에서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게끔 하는 역할로 쓰이고 있다. 텔레스크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을 감시당하는 입장에 놓인다.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 하나하나, 말 하는 것 하나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그 세계의 현실이다. 그들은 '감정'을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슬픔과 기쁨의 표현까지도 그 체계 앞에서는 주요 관심 대상이 되어버린다. 정부 내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개인적인 일이나 소일거리에 대한 일을 말하는 자체도 통제가 되고, 3명 이상의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안 된다. 증발되어버리지 않으려면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짓눌려야 하는 암담한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되니, 사람들의 행동은 다분히 기계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의 연속이다. 더군다나 어떠한 정치․사상에 대해 이견을 내 비추는 것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잘 못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순간 생각을 멈추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은 표정으로 다 나타나기 때문이며, 그 생각을 이어나가면 '위험'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스턴 스미스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기록국 내에서의 일 자체가 올바르지 않은 일인 줄은 알지만, 그러한 수치스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를 '죄중단'을 통해 막아버린다.
이러한 감정에 대한 통제는 자연스럽게 행동에 대한 통제를 낳는다.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권력 계층의 요구에 맞추도록 자신의 행동을 맞출 수밖에 없다. 현 상황에 대해 스스로를 위안하고, 적응할 수 있게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자신을 정부에 충실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감정을 막음으로써 행동을 제한하고, 그 행동의 제한이 감정을 죽이는 결과가 이어지는 것이 일상화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행동을 통제를 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사람들의 기억을 우선 지배한다. 정부는 현재 바르게 국가를 운영하고 있으며, 충실히 나라를 잘 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역사를 조작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실을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의식처럼, 과거 사실들을 거짓된 정보로 바꾸면서 마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사람들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원스턴 스미스는 기록부에서 역사와 사실에 대해 조작하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 또한, 감정과 행동, 사람들의 기억을 지배하기 위해서 지배 계층에서는 '신어'에 대한 작업을 한다. 언어의 범위는 사고의 범위이다. 언어를 지배하면서 사람들이 표현하고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한다. '신어'를 만들면서 정치적, 성적, 감정적인 것들을 표출할 수 있는 불필요한 언어들을 모두 제거하여 최소한의 의미만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해버린다.
감정, 행동, 과거, 언어의 지배는 결론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는 것이 된다. 감정 표현, 행동과 과거에 대한 철저한 조작은 언어․사고 외적인 부분 외의 어떠한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지배하면서 더 넓고 깊은 사실들을 탐구할 수 있는 여지를 줄여버린다. 언어 또한 자신이 표현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짓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인 대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믿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인식 자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분명 잘못 되고 있고, 자신이 잘못된 행동임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일반적인 현상이거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제한은 자신의 사상과 이념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하고, 자신이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이러한 생각, 행동, 감정, 언어, 과거, 사상의 지배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은 이러한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 나선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생각을 확장시켜나가며, 자신의 감정과 사실적인 과거의 일을 바탕으로 자신의 행동 범위를 조금씩 늘려나간다. 현 모습에 대해 반성해보면서 자신의 인식 범위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곳곳에서 정부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증발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의 믿음을 굳건하게 만들면서 조심스럽게 통제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그 와중에 자신의 감정을 은밀히 표현할 줄 아는 줄리아를 만나게 되고, 성적으로 통제되어 있는 남녀관계를 벗어나서, 서로 사랑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면서 일탈을 일삼는 계기가 된다. 이들은 만연해 있는 강압적이고, 지배적인 분위기 안에서 서로 사랑을 하면서도 행동은 항상 조심스럽다. 그러던 중 자신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 오브라이언에게서 만남의 제의를 받게 된다. 하지만 둘만의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골드 스타인 소속의 형제단인 줄만 알았던 오브라이언이 정부의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그들 배후에 있던 빅브라더 역시 정부가 만들어낸 가상이 인물인 뿐더러, 전쟁과 골드 스타인은 무산 계층의 불만의 표출구의 역할과 자신의 사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원스턴 스미스와 줄리아는 정부에게 사로 잡혀 자신들의 믿음을 혹독하고 강력한 고문을 통해 치욕과 두려움을 느끼는 과정에서 바꾸어 버린다. 체제 유지를 위한 규격화된 정신 개조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정부에게는 허구를 사실로 '믿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인 것이다. 원스턴 스미스와 줄리아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믿음을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할 수 밖게 없게 되어버린다. 끝내 원스턴 스미스는 빅 브라더를 사랑하며 최후를 맞이한다.
원스턴 스미스가 살고 있는 그 세계의 경직되고 체계화된 시스템 내에서 내가 원스턴 스미스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1984』의 세계의 사람들은 인식의 한계에 부딪혀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을 단편화시키고 일반화한다. 자신과 비교할 대상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이 할 일을 역사적 흐름 맡기며,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도맡아 한다. 이러한 현상이 『1984』의 가상 세계에서만 존재할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현실 세계에서도 사고의 범위가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각의 제한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이웃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데, 저 멀리의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 상상 조차 할 수나 있을까. 그들의 인식의 한계 내에서 우리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 또한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곳 이상의 세계를 생각하고, 상상하지 못한다. 틀에 박힌 생활 속에서 다른 전달 매체 없이는 이웃 지역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고, 얼마나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범위가 존재의 범위를 결정한다고 믿는 편이 좋을 것이다. 『1984』의 세계에서 있던 사람이 증발되어버리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처럼,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을 하고 있느냐 하고 있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실재로 정형화된 어떤 것이 지구상에 '존재' 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모르면 우리의 인식 영역에서는 그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없고,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은 원스턴 스미스의 세계에서는 아주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과 인식하는 것에는 그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기 위한 믿음이 전제가 되어있어야 한다. 실제로 사실적인 증거가 있는 대도 불구하고, 믿음에 대한 강한 일념으로 합리화를 통한 정당성을 주장 하는 오류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학문적인 자세를 가진 교수나 학생들까지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실과 배경지식 때문에, 흔히들 무조건적인 방법으로 거짓을 사실로 믿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원스턴 스미스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행동 하나하나가 철저히 '텔레스크린'으로 저지당하고, 주변 사람들의 생각 또한 정부가 원하는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오류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을 가지는 자세를 더더욱 가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 철저한 감시와 이념 교육을 통해 자식이 부모를 신고를 하는 것 또한 올바른 일이 되어버리고, 자신이 정부의 믿음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죄중단'을 통해 생각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특이한 '이중 사고'의 방식으로 잘못된 행동을 자신에겐 유리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리한 형태로 해석해버리며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를 해버린다.
『1984』가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는 너무나도 극단적으로 경직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체제를 가지는 계층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정부도 그렇고, 이웃나라인 북한에서도 존재한다. 원스턴 스미스가 살고 있는 세계와 북한과 사뭇 비슷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가 없다. 빅 브라더가 실존한다는 것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겠지만, 전쟁을 빌미로 국민들을 전쟁을 통해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고, 김정일이, 위대한 우상이 되어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다. 철저히 조작되고 날조하여, 역사를 자신의 국가에 유리하도록 바꾸어 버린다. 『1984』가 예견한 비슷한 권력 세계가 현 세계에서도 존재한다. 굳이 이러한 세계를 보지 않더라도, 인식의 지배를 위한 작업을 하는 나라는 얼마든지 주위에서 볼 수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그렇고, 일본의 역사 왜곡이 간단한 예이다. 과거를 지배하면서, 사람들의 기억을 바꾸는 작업을 하고, 교육을 통해 진실을 비틀어 거짓으로 바꾸어 진실이 되게 한다. 우리 주변의 곳곳에서 인식의 지배는 흔하게 일어나며, 현재도 물론 그러한 지배가 행해진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소위 일컬어지는 '정치'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원스턴 스미스의 세계에서 처럼 당연한 듯 행동하고 있는 일들이 충분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문화, 정책적인 흐름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스턴 스미스의 세계와 다른 큰 차이점은 끊임없이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고, 우리가 모르는 세계와 다른 지식들을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권에 대한 보장과, 사고에 대한 자유가 있어서, 무조건적인 사회 흐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배움과 성찰을 통해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책을 통해서 비판적 사고가 사라진 세계를 알고, 그 같은 세계가 가지는 위험적인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더욱더 진실을 탐구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현실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생각이 필요하다. 어쩌면 나 자신 스스로도 정부가 추구하고 바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경쟁이 치열한 사회를 위해 현 삶에서의 스스로에 대한 만족과 꿈을 잊어 버린 채, 기업이 요하는 요구 사항만을 충족시키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있을 지도 모른다.
정보화 시대가 접어들면서 정보들은 넘쳐나고 있다. 그 정보의 양만큼 우리는 다양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접어들었다. 우리가 접하는 정보의 양만큼 지배 계층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의 크기 또한 늘어났다. 몰래 카메라, 핸드폰 도청과 패킷 감정, 인터넷 접근 감시 등이 가능해지면서 새로운 정보 권력이 생겨났고, 그 정보의 흐름 자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커다란 권력이 되었다. 우리가 정보를 활용하고 공개하는 만큼 새로운 지배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정보는 곧 인식의 범위이고 그것을 가진 만큼 우리는 다양한 정보를 흡수할 수 있을 테지만, 그 정보로 인해 또 다른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자신의 흥미, 관심도, 불법적인 자료의 접근 등의 자신의 개인 정보가 인터넷 선을 통해 감지되고, 곳곳에 흩어져있는 카메라는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건물, 거리에서 뿐만 아니라 집 안에서도 사람들의 행동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알 수 있게 되는 처럼 커다란 권력에 맞서 투쟁할 수 있다는 희망은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고 있는 누군가의 강압은 쉽게 이길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닐 터이다. 『1984』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미래의 모습이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있음직한 일임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보의 흐름을 지배하게 되면, 개인의 감정과 행동, 과거의 사상을 지배하면서 개인의 인식을 지배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지배에 통제당하지 않기 위해 맞서 싸울 지식과 의식이 열려 있다. 폭넓은 사고와 경험을 통하여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인이며, 부조리한 상황에 맞서 당당히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 준거 집단 내에서 서로간의 티격태격 무의미한 경쟁을 피해서 좀더 넓고 크게 보면서, 사회에 대한 순응보다는 현실을 개혁할 만한 능력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1984』에서 조지 오웰이 전하는, 암울한 불신의 사회, 무표정의 사회, 철저한 인식의 지배를 당하는 사회에서 벗어나 우리의 생각을 당당히 말할 수 있고, 행동에 옮길 수 있으며, 옳은 일이 행해지는 사회가 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정치'와 '마녀 사냥'과 같은 악용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닌, 진리와 진실을 알 수 있고, 전파해주는 유용한 도구로써 인터넷과 대중 매체를 올바르게 이용해야 할 것이다. 개인 스스로도 잘못된 것을 고칠 줄 아는 현명함이 필요하며, 자신의 의식을 통제함으로써 나도 모르는 사이 찾아오는 나에 대한 지배를 벗어나야 한다.
조지 오웰은 우리에게 인식이 지배당하는 것의 무서움을 한 편의 소설로서 넌지시 던져주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의 불공평한 현실 세계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보다는 감정, 행동, 기억의 지배가 얼마나 크게 한 개인과 집단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 실감나게 표현해 주고 있었다. 조지 오웰이 그리는 소설의 모습은 결코 우리에게 생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얼마든지 표현 가능한 자유스런 환경에서 살고 있고,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인식의 확장으로 사리분별을 판별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하고, 배우면서 애국심만으로, 또는 정치의식 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닌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사회에 진실과 진리를 퍼뜨리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